대동여지도는 진정 김정호가 제작한 것이 맞나?(최선웅의 지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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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148,110회 작성일 18-08-01 13:00본문
대동여지도는 진정 김정호가 제작한 것이 맞나?
거의 모두 추측성 자료나 발표만 학계에 난무
김정호는 이들의 성과를 집대성해서 우수한 완성품을 만들어낸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았던 김정호가 이러한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 제작을 적극 도와준 최한기와 신헌 등의 후원자 덕으로 보기도 하고 또한 김정호 자신이 이러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교서관 소속의 목각 기술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중략)…또 김정호가 교서관 소속의 목각기술자였을 것이란 추정은 ‘청구도’를 완성하던 해 김정호가 최한기의 부탁으로 ‘지구전후도’를 나무판에 새겼다는 기록과 “원래부터 공교한 재주가 있었다”는 <이향견문록>의 기록, 그리고 김정호가 고향인 황해도에서 올라와 서울의 약현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무렵 약현에는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과 역시 훈련도감에 소속된 활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살았다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은 윤희진 저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에 실려 있는 글이다. 그동안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김정호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기록이 수없이 발표되었으나 하나같이 추상적이고 비논리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어왔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심층연구하는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에도 김정호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실학자겸 지리학자. 본관은 청도. 일명 정호(正 ).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와 친교가 깊었고, <대동여지도>의 재간(再刊)과 <대동지지>의 간행연도가 모두 1864년(고종 1년)인 것으로 보아 1800년경에서 1864년경까지 살았으며, 순조·헌종·철종대에 걸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 밖 만리재(萬里峴)에 살았다고도 하고, 공덕리(孔德里)에 살았다고도 한다. 불우한 생활 속에서 오직 지도 제작과 지지 편찬(地志編纂)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불과 120여 년 전의 일이면서도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 이토록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은 사대부 집안이 아닌 데다, 당시까지만 해도 실학에 대한 인식, 특히 지도 제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약했던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특히 개인의 지도 제작은 천기를 누설한다 하여 당시로서는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밑줄 친 부분만 보더라도 불과 150년 전의 역사적 인물이 어느 것 하나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그저 ‘미상’이거나 ‘추측’이거나 ‘가정’만으로 기술되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이 들게 한다.
2001년 국립지리원에서 펴낸 <고산자 김정호 기념사업 자료집>을 보면 김정호에 관한 기록이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잘못 기술된 것인지 그 내력을 살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김정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25년 10월 8일과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고산자를 懷함(上)(下)’이란 기사다. 내용을 추리면, 김정호를 근대 조선의 국보라 칭송하면서 생몰연대나 가계는 불상이고, 지도를 그리기 위해 팔역(八域)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 올라갔으며 이를 위해 수십 년 과객(過客)질을 하였고, 과년한 딸이 판각을 도왔으며, 판각을 관청에 몰수당한 것까지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호의 소설 같은 기록과 다름 없다. 1934년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는 물론 1941년 문일평이 쓴 <김정호>, 1947년 최남선이 쓴 <김정호>, 1955년 정인보가 쓴 <대동여지도>, 1972년 이병도가 쓴 <김정호>에 이르기까지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천편일률적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만들지 않았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글을 쓴 사람은 측지학자인 성남해(成南海)가 유일하다. 그는 대한측량협회 기관지인 측량 제59호(2001년 11월)에 ‘대동여지도 연구의 제문제’란 연재에서 이 글을 썼는데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타당성 있는 근거를 내세우며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먼저 대동여지도 표지에 쓰여 있는 ‘古山子校刊(고산자교간)’이다. 교간이라 함은 지도를 교정보아 간행한 것으로 김정호 저작이라는 말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중인인 최성환(崔王星煥)과 같이 만든 여도비지(輿圖備志)에도 지리지는 ‘崔王星煥彙編(최성환휘편)’이라 하였고, 지도 부분은 ‘金正浩圖編(김정호도편)’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도편이라는 것도 지도를 편집하였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를 김정호 작(作)이라 쓴 문헌은 1862년 유재건(劉在建)이 펴낸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인데 실제 유재건은 김정호와는 일면식도 없고 다만 대동여지도와 관련 자료만 보고 쓴 과장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지도 제작은 개인이 할 수 없는 국가사업이다’라는 것이다. 지도 제작은 특수한 기술과 방대한 자금, 인원,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옛날이라 할지라도 그때 나름대로 가장 최첨단의 기술을 적용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셋째, ‘고지도의 지도 제작자는 답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30여 년간 전국을 몇 번 답사하였다, 옥사당했다, 청일전쟁에 사용했다, 토지조사 때 사용했다, 경위도를 사용했다, 백두산을 몇 번 올랐다는 등의 주장은 근거 없는 막연한 것이란 그의 논지다.
어느 학회 토론장에서 “대동여지도는 관찬지도인가, 사찬지도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머뭇거리던 발표자는 “개인 생각으로는 사찬지도다” 라고 답변했다.
▲ 대동여지도를 자세히 보면 지도표에 나와 있는 군사 관련 기호가 빼곡히 표시되어 있다. 작금에도 군사시설은 물론 보안에 저촉되는 시설은 지형도에 표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하물며 국법이 지엄했던 조선시대에 대동여지도가 개인에 의해 제작되고 통용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형 이외에 영위(營衛),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봉수(烽燧) 등 군대의 관아는 물론 군사기지, 통신시설 등이 기호로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봉수란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통신제도의 하나로서 일반 백성들의 개인적 의사나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공의 정치적·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봉수는 고종 6년(1889년)까지도 사용되었음이 입증되고 있는데 이러한 중요한 국가적 통신시설이 어떻게 미천한 신분의 개인에 의해 지도에 표기될 수 있었을까.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H.카는 “역사가가 자기의 입장에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자유지만, 그 해석이 사료에 의해 실증되고 논리적으로 합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동여지도는 분명 김정호를 비롯한 우리 조상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호에 대한 막연한 통설이나 상식은 이제 학제 간을 비롯하여 관계되는 여러 분야에서 신중히 검토하고 깊이 연구해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잘못된 역사에 대해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출처 : 조선닷컴. 2010/2/26)
홈지기) 논쟁적인 문제 제기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물음에 설득력이 있는 답변이 나올 때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평가가 비로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어 올립니다.
거의 모두 추측성 자료나 발표만 학계에 난무
김정호는 이들의 성과를 집대성해서 우수한 완성품을 만들어낸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았던 김정호가 이러한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도 제작을 적극 도와준 최한기와 신헌 등의 후원자 덕으로 보기도 하고 또한 김정호 자신이 이러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교서관 소속의 목각 기술자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중략)…또 김정호가 교서관 소속의 목각기술자였을 것이란 추정은 ‘청구도’를 완성하던 해 김정호가 최한기의 부탁으로 ‘지구전후도’를 나무판에 새겼다는 기록과 “원래부터 공교한 재주가 있었다”는 <이향견문록>의 기록, 그리고 김정호가 고향인 황해도에서 올라와 서울의 약현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무렵 약현에는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과 역시 훈련도감에 소속된 활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살았다는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은 윤희진 저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에 실려 있는 글이다. 그동안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김정호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기록이 수없이 발표되었으나 하나같이 추상적이고 비논리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어왔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심층연구하는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에도 김정호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실학자겸 지리학자. 본관은 청도. 일명 정호(正 ).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崔漢綺)와 친교가 깊었고, <대동여지도>의 재간(再刊)과 <대동지지>의 간행연도가 모두 1864년(고종 1년)인 것으로 보아 1800년경에서 1864년경까지 살았으며, 순조·헌종·철종대에 걸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 밖 만리재(萬里峴)에 살았다고도 하고, 공덕리(孔德里)에 살았다고도 한다. 불우한 생활 속에서 오직 지도 제작과 지지 편찬(地志編纂)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불과 120여 년 전의 일이면서도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 이토록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은 사대부 집안이 아닌 데다, 당시까지만 해도 실학에 대한 인식, 특히 지도 제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약했던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특히 개인의 지도 제작은 천기를 누설한다 하여 당시로서는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밑줄 친 부분만 보더라도 불과 150년 전의 역사적 인물이 어느 것 하나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그저 ‘미상’이거나 ‘추측’이거나 ‘가정’만으로 기술되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이 들게 한다.
2001년 국립지리원에서 펴낸 <고산자 김정호 기념사업 자료집>을 보면 김정호에 관한 기록이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잘못 기술된 것인지 그 내력을 살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김정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25년 10월 8일과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고산자를 懷함(上)(下)’이란 기사다. 내용을 추리면, 김정호를 근대 조선의 국보라 칭송하면서 생몰연대나 가계는 불상이고, 지도를 그리기 위해 팔역(八域)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하고 백두산을 일곱 번 올라갔으며 이를 위해 수십 년 과객(過客)질을 하였고, 과년한 딸이 판각을 도왔으며, 판각을 관청에 몰수당한 것까지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호의 소설 같은 기록과 다름 없다. 1934년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는 물론 1941년 문일평이 쓴 <김정호>, 1947년 최남선이 쓴 <김정호>, 1955년 정인보가 쓴 <대동여지도>, 1972년 이병도가 쓴 <김정호>에 이르기까지 김정호에 대한 기록은 천편일률적이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만들지 않았다”고 정면으로 부인한 글을 쓴 사람은 측지학자인 성남해(成南海)가 유일하다. 그는 대한측량협회 기관지인 측량 제59호(2001년 11월)에 ‘대동여지도 연구의 제문제’란 연재에서 이 글을 썼는데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타당성 있는 근거를 내세우며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먼저 대동여지도 표지에 쓰여 있는 ‘古山子校刊(고산자교간)’이다. 교간이라 함은 지도를 교정보아 간행한 것으로 김정호 저작이라는 말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중인인 최성환(崔王星煥)과 같이 만든 여도비지(輿圖備志)에도 지리지는 ‘崔王星煥彙編(최성환휘편)’이라 하였고, 지도 부분은 ‘金正浩圖編(김정호도편)’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도편이라는 것도 지도를 편집하였다는 뜻이다. 대동여지도를 김정호 작(作)이라 쓴 문헌은 1862년 유재건(劉在建)이 펴낸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인데 실제 유재건은 김정호와는 일면식도 없고 다만 대동여지도와 관련 자료만 보고 쓴 과장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 ‘지도 제작은 개인이 할 수 없는 국가사업이다’라는 것이다. 지도 제작은 특수한 기술과 방대한 자금, 인원, 시일이 소요되기 때문에 옛날이라 할지라도 그때 나름대로 가장 최첨단의 기술을 적용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셋째, ‘고지도의 지도 제작자는 답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30여 년간 전국을 몇 번 답사하였다, 옥사당했다, 청일전쟁에 사용했다, 토지조사 때 사용했다, 경위도를 사용했다, 백두산을 몇 번 올랐다는 등의 주장은 근거 없는 막연한 것이란 그의 논지다.
어느 학회 토론장에서 “대동여지도는 관찬지도인가, 사찬지도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머뭇거리던 발표자는 “개인 생각으로는 사찬지도다” 라고 답변했다.
▲ 대동여지도를 자세히 보면 지도표에 나와 있는 군사 관련 기호가 빼곡히 표시되어 있다. 작금에도 군사시설은 물론 보안에 저촉되는 시설은 지형도에 표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하물며 국법이 지엄했던 조선시대에 대동여지도가 개인에 의해 제작되고 통용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지형 이외에 영위(營衛),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봉수(烽燧) 등 군대의 관아는 물론 군사기지, 통신시설 등이 기호로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봉수란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통신제도의 하나로서 일반 백성들의 개인적 의사나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공의 정치적·군사적 통신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봉수는 고종 6년(1889년)까지도 사용되었음이 입증되고 있는데 이러한 중요한 국가적 통신시설이 어떻게 미천한 신분의 개인에 의해 지도에 표기될 수 있었을까.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H.카는 “역사가가 자기의 입장에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자유지만, 그 해석이 사료에 의해 실증되고 논리적으로 합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동여지도는 분명 김정호를 비롯한 우리 조상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업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김정호에 대한 막연한 통설이나 상식은 이제 학제 간을 비롯하여 관계되는 여러 분야에서 신중히 검토하고 깊이 연구해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잘못된 역사에 대해 방관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 글 최선웅 한국산악회 부회장·매핑코리아 대표
(출처 : 조선닷컴. 2010/2/26)
홈지기) 논쟁적인 문제 제기일 수 있지만, 이러한 물음에 설득력이 있는 답변이 나올 때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평가가 비로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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